여름방학의 시작은 선풍기에서 났다
방학 첫날 아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귀에 들어오는 건 선풍기 돌아가는 ‘윙’ 소리였다. 그리고 곧이어 느껴지는 냄새, 바로 선풍기 뒤편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플라스틱 냄새**.
그건 새로운 냄새는 아니었다. 매년 여름이면 익숙하게 다시 돌아오던 향기. 다소 뜨겁고, 기계적이고, 어디선가 살짝 타는 듯한 느낌도 있었지만 묘하게 안정되고 반가운 냄새였다.
그 냄새를 맡는 순간, 나는 “이제 여름이다”라고 실감했다.
선풍기의 바람은 냄새까지 데려왔다
어릴 적, 우리 집 선풍기는 늘 거실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버튼은 눌릴수록 더 뻑뻑해졌고, 회전 기능은 삐걱거렸지만 그 선풍기가 뿜어내는 바람은 여름의 전부였다.
그리고 그 바람 속엔 **선풍기 뒷면의 향기**가 있었다. 먼지가 살짝 낀 플라스틱 팬에서 나는 냄새, 모터가 돌아가면서 나오는 미세한 열기, 때론 콘센트 주변의 고무 타는 냄새까지 섞였다.
그 향기는 다른 어떤 향수보다 **계절을 또렷하게 기억시켰다**. 그걸 맡고 있으면, 여름 특유의 느슨함과 나른함이 몸을 감쌌다.
그 냄새 속에는 여름이 있었다
플라스틱 냄새를 따라 기억을 더듬으면 무더운 오후, 반바지와 민소매 차림으로 바닥에 드러누운 나, 만화책을 펼쳐놓고 수박을 먹던 모습이 떠오른다.
선풍기 바람을 입으로 받아보겠다며 입을 벌리고 있던 어린 나, 동생과 바람 쐬는 자리 때문에 싸우던 모습,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나는 항상 같은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건 단지 기계의 냄새가 아니었다. **시간의 냄새, 가족의 냄새, 어린 시절의 공기**였다.
그 냄새는 무언가가 '흘러간다'는 감각이었다
선풍기의 냄새가 특별했던 이유는 그 안에 ‘흐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회전하는 날개, 돌아가는 바람, 그리고 시계처럼 일정한 리듬.
그 바람은 시간처럼 흘렀고, 그 냄새는 그 시간을 기억하게 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 다시 그 냄새를 맡으면, 내가 ‘하루 안에 계속 살아가고 있다’는 안정감이 들었다.
지금처럼 분주하게 움직이지 않던 시절, 그저 머무르는 시간이 존재하던 시절의 향기였다.
지금은 맡을 수 없는 향기, 마음에만 남아 있다
이제는 그 냄새를 맡을 수 없다. 요즘 선풍기는 무취에 가깝고, 에어컨은 차가운 공기만 내보낼 뿐 아무 향도 없다.
가끔 예전 선풍기를 꺼내도 그 플라스틱 냄새는 이미 휘발되어 버렸다. 세제가 바뀌고, 먼지가 줄었고, 모터 소음도 줄어든 세상에서는 그 향기가 설 자리가 없다.
그래도 나는 안다. 그 냄새는 여전히 **내 기억 속 여름을 열어주는 열쇠**라는 걸.
플라스틱 냄새가 알려준 ‘느림’의 미학
우리는 빠르게 살고 있다. 여름도 빨리 지나가고, 기억도 금세 덮여버린다.
그런 시대에서 플라스틱 냄새는 느림의 상징이었다. 바람을 기다리는 시간, 회전이 끝날 때까지 멍하니 앉아 있던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방학의 오후.
그 냄새는 ‘잠시 멈추는 삶’이 가능했던 시간의 향기였다.
맺으며 – 선풍기 냄새가 그리운 날
지금도 여름이면 어김없이 그 냄새가 떠오른다. 플라스틱 냄새, 땀 냄새, 책 냄새, 그리고 바람.
그 향기들은 더 이상 현실에 존재하지 않지만 마음속에서는 매년 여름, 다시 피어난다.
선풍기 뒤편의 플라스틱 냄새를 다시 맡을 수는 없지만, 그 냄새를 기억하는 나는 아직도 그 여름 한가운데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냄새는 사라지지만, 그 냄새 속에 담긴 마음은 계절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다.
플라스틱 냄새에 스며든 작은 여름의 디테일
그 냄새는 단순히 기계에서 나는 냄새가 아니었다. 그 안엔 작은 디테일들이 숨어 있었다. 오전 11시, 선풍기 바람을 쐬며 누워 듣던 라디오 소리. 볼륨을 낮추면 들리던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음. 그리고 엄마가 멀리서 부르던 “점심 먹자”는 목소리.
그 모든 장면이 하나의 향기로 묶여 있었다. 플라스틱 냄새는 결국 그 **모든 조각의 접착제** 같은 존재였다. 그 냄새를 맡을 때면 모든 사소한 기억이 퍼즐처럼 맞춰지며 나를 그 여름의 어느 오후로 데려갔다.
게으른 낮잠, 반쯤 녹은 아이스크림, 맨바닥에 눕기 전 깔던 대자리의 시원함. 그 감각들이 냄새와 함께 살아 있었다.
냄새는 사진보다 오래 남는 기억의 필름
사람들은 추억을 사진으로 남기고, 기억을 글로 적는다. 하지만 나는 안다. 냄새야말로 가장 오래 남는 기억의 매체라는 것을.
사진은 시선을 담고, 글은 생각을 담지만 냄새는 감정을 바로 꺼내 온다. 플라스틱 냄새를 떠올리면 나는 설명 없이도 그 여름의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아무도 모르게 미소 지을 수 있고, 혼자만의 감정으로 조용히 젖을 수 있는 오롯한 ‘나의 여름’이 된다.
그건 향기이자 시간이고, 공기이자 감정이고, 과거이자 지금인 순간이다.
다시 그 여름을 살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다
세상이 바뀌고, 기술이 바뀌고, 모든 게 쾌적하고 정돈되어 가지만 나는 가끔 그 ‘거칠고 조금은 텁텁했던’ 여름이 그립다.
바람은 선풍기 날개를 돌리며 불어왔고, 그 바람 속에는 세상의 모든 시간이 들어 있었다. 덥고, 느리고, 조용하고, 나른한 감정.
이제는 더 이상 같은 냄새를 만들 수 없지만 그 냄새가 나를 만들어주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나는 오늘도 그 여름의 냄새를 기억하며 살아간다. 계절이 바뀌어도, 해가 지나도, 마음속 그 향기만은 여전히 내 안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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