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는 기억보다 오래 남는다
어떤 기억은 흐려지는데, 어떤 향기는 여전히 선명하다. 기억은 머릿속에 저장되지만, 향기는 마음속 어딘가에 스며든다. 그래서일까. 나는 문득 떠오르는 향기 하나로 그 시절의 나를 마주하게 된다.
내가 좋아하던 냄새들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어디서도 다시 맡을 수 없는 향기들이고, 누구에게 설명해도 그 느낌이 완전히 전해지지 않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의 냄새다.
그렇기에 그 향기들은 더욱 소중하다. 그건 단순한 후각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떤 시절을 어떻게 살았는지를 기억하게 해주는 작은 증거이기 때문이다.
비 오는 날 콘크리트 바닥에서 올라오던 냄새
비가 내린 직후, 아스팔트 바닥과 콘크리트 벽에서 퍼져 나오던 특유의 냄새가 있었다. 축축하면서도 약간은 따뜻했고, 빗물이 먼지를 눌러서 만들어낸 독특한 향기였다.
어린 시절, 나는 그 냄새를 유난히 좋아했다. 우산을 쓰고도 일부러 벽에 기대거나 아파트 복도에 쪼그려 앉아 그 냄새를 맡았을 정도였다.
지금은 도로 포장이 달라지고, 환경이 정돈되면서 그 냄새는 거의 사라졌다. 가끔 비 오는 날 비슷한 냄새가 올라올 때면 나는 그 시절 골목길의 느낌이 스며든 어떤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
방바닥에서 올라오던 낮잠의 냄새
여름 낮, 바닥에 대나무 자리나 얇은 요를 깔고 드러누웠던 오후가 있다. 그때 코를 간질이던 건 햇빛에 데워진 방바닥의 냄새였다. 섞여 있던 건 왁스 냄새, 먼지 냄새, 그리고 살짝 땀이 밴 이불에서 올라오던 몸의 잔향.
나는 그 냄새가 좋았다. 졸음이 밀려오기 직전의 포근하고도 나른한 감각과 함께 떠오르던 향기. 그건 단순한 방의 냄새가 아니라, 걱정 없는 하루의 향기였다.
지금은 그 바닥도, 그 자리도, 그런 긴 낮잠도 없다. 그래서 그 향기가 그립다. 어디에서도 맡을 수 없는 오후 3시 반의 냄새.
국어 교과서 종이 냄새
새 학기마다 받았던 교과서 중 국어책에서만 나는 종이 냄새가 있었다. 다른 책들보다 조금 두껍고, 종이가 질감 있게 눅눅했던 그 책은 펼치기만 해도 고유의 냄새가 퍼졌다.
나는 국어책을 읽기 전 항상 먼저 냄새를 맡았다. 그 냄새는 마치 나에게 “이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신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디지털 교과서, 온라인 수업으로 종이 냄새 자체가 낯설어졌다. 가끔 헌책방을 지나칠 때면 그 비슷한 냄새가 나기도 하지만 그때의 국어책 향기는 더 이상 없다.
엄마가 다림질하던 셔츠에서 나는 전기 냄새
어릴 적, 아침이면 거실에서 엄마가 다리미로 아버지의 셔츠를 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다리미에서 나는 약간 탄듯한 전기 냄새를 유독 좋아했다.
스팀이 피어오르고, 셔츠가 평평해지는 동안 나는 옆에 서서 그 냄새를 맡으며 멍하니 서 있곤 했다. 그 냄새엔 ‘아침’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가족이 분주하게 하루를 시작하는 분위기, 긴장과 설렘이 섞인 공기.
지금은 다리미 대신 스타일러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셔츠 대신 반팔티가 옷장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 전기 냄새를 느낄 일이 없다.
문구점에서 새로 산 공책과 비닐 포장의 냄새
새 학기, 문구점에서 산 공책을 가방에 가득 넣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 가방 안에서는 특유의 냄새가 퍼졌다. 플라스틱 필통 냄새, 비닐 포장지 냄새, 그리고 갓 인쇄된 종이에서 나는 새 책 향.
나는 그 냄새를 맡으며 ‘새로운 시작’을 느꼈다. 공책의 빈 페이지는 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았기에 가능성으로 가득했고, 그 냄새는 일종의 의욕이었다.
지금은 새 공책을 살 일도, 그 포장을 뜯을 일도 거의 없다. 하지만 그 냄새는 여전히 내게 시작의 에너지로 남아 있다.
향기는 기억의 문을 여는 열쇠
내가 좋아하던 냄새들은 더 이상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향기들을 떠올리는 순간, 나는 그때의 공기, 감정, 장소까지 선명하게 기억해낼 수 있다.
그건 향기가 단순한 냄새가 아니라 기억을 여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 냄새를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너무 사소하고, 너무 개인적인 향기이기에. 하지만 내겐 그 향기들이 나 자신을 구성한 조각이었다.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향기들
세상은 달라졌고, 냄새도 바뀌었다. 공기는 더 정제되고, 냄새는 탈취되고, 기억은 디지털로 저장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가끔 그 잊힌 향기를 찾는다. 비 오는 날 창문을 열고, 오래된 책을 꺼내고, 어느 오후에는 가만히 바닥에 앉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던 냄새들은 사라졌지만, 결국 내 안에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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