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은 없었지만, 내 안에 남은 장면은 있었다
인생을 살면서, 누군가 내게 진지하게 이런 질문을 해준 적은 없다. “당신 삶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언제였나요?” 아마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질문을 해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말들을 낯설어하고, 너무 큰 이야기처럼 느끼곤 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 질문은 때로 너무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는, 작지만 분명했던 몇 개의 장면 덕분이기 때문이다.
그 장면들은 화려하지 않았고, 특별한 조명이 비춰지지도 않았다. 대부분 평범한 일상 속에서 갑자기 찾아왔다. 그때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그 순간들이 내 삶의 방향을 바꾼 나침반이었다.
첫 번째 장면 – 고3 겨울, 친구의 말 한마디
“너는 글을 쓰는 게 어울리는 사람 같아.” 이 말은 고등학교 3학년 겨울, 입시 스트레스에 눌려 있던 어느 날, 같은 반 친구가 무심하게 꺼낸 말이었다.
당시 나는 학교 교지 편집을 맡고 있었고, 심심풀이 삼아 시나 에세이를 자주 끄적이던 시절이었다. 그 친구는 아마도 그냥 던진 말이었겠지만, 그 말은 내 안에서 아주 오래 남았다.
그 말을 듣고 난 이후, 나는 ‘나에게 맞는 일’이 무엇일지 조금씩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말은 나에게 ‘잘한다’가 아닌 ‘너답다’는 느낌을 줬다. 그건 어쩌면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첫 경험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글을 쓸 때면, 그때 그 말이 종종 떠오른다. 그 말 한마디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두 번째 장면 – 첫 월급, 부모님께 건넨 봉투
첫 직장에서 받은 월급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내 손으로 번 돈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그 돈 중 일부를 봉투에 담아 부모님께 드렸다.
아버지는 말없이 받으셨고, 어머니는 조용히 미소 지으셨다. 그날 식탁 위에선 평소보다 말이 적었지만, 오히려 그 침묵이 더 깊은 대화를 나눈 것 같았다.
그 순간은 내게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해준 장면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돈이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감정과 마음이 오가는 매개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매달 월급날마다 그때의 기분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감정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게 내가 일에 진심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세 번째 장면 – 사표를 낸 오후, 이상하게도 담담했다
사직서를 작성하고 출력하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하지만 ‘제출’ 버튼을 누르는 그 순간은 단순하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는 미련, 두려움, 후련함, 설렘이 동시에 존재했다.
그날 오후, 사무실 복도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묘하게 가볍고 무거웠다. 팀장님께 사직서를 건넸을 때, 예상 외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시던 모습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늘은 맑았고 공기는 차가웠다. 그날 이후, 나는 많은 것을 새롭게 시작했다. 처음으로 나의 시간을 100% 내 의지로 구성하게 되었고, 일이 없는 날의 불안과 동시에 자유를 함께 마주했다.
이 경험은 단순한 ‘퇴사’ 그 이상이었다. “무언가를 끝낸다는 건, 새로운 걸 시작하겠다는 내적인 선언이다.”
네 번째 장면 – 오랜 친구가 건넨 말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대학 친구를 몇 년 만에 만났다. 우리는 카페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서로의 변화에 대해 웃으며 말했다.
그 친구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넌 나이 들수록 참 괜찮아진다.”
그 말은 다른 말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건 외모나 성취에 대한 말이 아니었다. ‘사람됨’ 자체에 대한 인정처럼 들렸다.
그 말을 듣고 집에 돌아가는 길, 나는 나이가 드는 게 마냥 두렵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이제는 나이든다는 것이 퇴보가 아니라, 깊어지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다섯 번째 장면 – 손주를 처음 안은 날
내 아이가 부모가 되고, 내가 할아버지가 된 날. 그 감정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작은 생명이 나에게 안겨 있었고, 그 아이는 내 유전자의 또 다른 버전처럼 느껴졌다.
손주의 작은 손을 잡았을 때, 나는 처음으로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눈으로 본 듯했다.
그 순간 나는 인생이 어떻게 흐르고 이어지는지를 몸으로 느꼈다. 나를 지나 다른 사람에게로 이어지는 감정과 책임.
그날 이후, 나는 내 삶을 더 차분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손주가 웃는 얼굴을 볼 때마다,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그건 마치 인생의 순환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마법 같은 시간이었다.
결정적 순간은 남이 묻지 않아도 기억에 남는다
누가 묻지 않아도, 어떤 장면은 평생 가슴에 남는다. 기억이라는 건 그렇게 의외의 힘을 갖고 있다. 소란스럽지 않지만 선명하고, 작지만 묵직하게 남는 순간들이 있다.
그 장면들은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꾸진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히 나를 조금 더 ‘나답게’ 만든 순간들이다.
나는 그 장면들을 글로 적으며 다시 살아본다. 어떤 날에는 다시 그 날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고, 어떤 날에는 그런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지금의 내가 고맙기도 하다.
우리는 누구나, 말하지 않은 결정적 순간을 품고 살아간다. 그건 이야기로 꺼내지 않아도 삶의 어딘가에 빛처럼 남아 있다.
맺음말 – 언젠가 말하게 될지도 모를 이야기들
이 글은 누가 요청해서 쓰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내가 잊지 않고 싶어서,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였나요?” 나는 이 글을 꺼내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누구도 물어보지 않았던 질문에, 지금 나는 스스로 답을 적는다.
당신은 어떤 장면을 기억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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